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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제일교회 장광영 목사편 -역경의 열매(1) >

1996년 12월 11일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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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을 앞두고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가득 울려 퍼지고 있다. 이 성탄절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곧장 1945년, 초등학교 3학년의 겨울로 되돌아간다.

인천에서도 배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인천시 옹진군 자월도. 이 자그마한 섬마을이 내가 태어난 고향이다. 당시 인구 7백여 명이던 이 섬마을에 선교사의 전도로 교회가 들어서고 주일마다 어린이를 위한 예배와 프로그램이 마련된 것은 내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기차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던 나로서는 교회야말로 최대의 기쁨을 주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7남매 중 여섯째였던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유행병으로 부친을 잃었다. 그래서 맏형님을 부모님처럼 여기며 지냈는데 이 형님이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영접, 독실한 신앙인이 되셨기에 교회출석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던 것이다.

내가 주일이 돌아오길 손꼽아 기다릴 정도로 교회를 좋아한 것은 두 가지 이유였다.

남편을 잃고 어려운 살림을 힘겹게 하시는 어머니는 내가 조금만 말썽을 부려도 "나가 죽어라, 이놈아"하시며 불호령을 내리셨다.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한의 표출"로 이해되는데 그때는 그것이 너무 싫었다. 그런데 교회에 가면 전도사님과 선생님들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너는 "복 있는 아이"라고 축복을 해주시는가 하면 똑똑하다며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형제가 많아 특별한 사랑도 받지 못한 나로서는 나를 인정해 주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그리고 또 교회에서 율동을 하고 성경이야기를 듣고 특별활동으로 성극을 하는 것이 문화시설이 전무한 시절이라 너무나 재미있었다. 부활절과 추수감사절, 성탄절에 갖는 성극은 어린이 뿐 아니라 마을 전체의 행사이기도 했다.

이 성탄절의 성극과 캐럴이 지금껏 가슴속에 남아 기억으로 떠오르는 것은 이것이 바로 "믿음의 씨앗"으로 내게 심기워졌기 때문이다. 아직 인격과 감성이 바르게 성장되기도 전인 이 무렵의 신앙은 기독교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었지만 후일의 영적 변화에도 크게 작용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의 삶은 결국 하나님의 크신 섭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오묘한 섭리의 톱니바퀴 속에 맞물려 한치의 오차 없이 진행돼 왔음을 고백치 않을 수 없다.

나는 학교보다 교회에서 배우고 느끼는 것이 더 많았다. 교회를 학교보다 더 좋아한 것이 이유이기도 했다. 당시 "아는 것이 힘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지혜와 총명이 생긴다", "하늘을 경배하면 백성이 잘산다. 선진국의 대부분이 기독교 국가다" 등이 자주 들었던 이야기다.

당시 우리 집 형편으로는 중학교 진학이 힘들었다. 인천으로 유학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님은 더 배워야 한다고 격려했고 나 역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결심이 서 있었다.

당시는 정기적인 배편이 없었기에 돛단배를 타고 인천으로 향했는데 만 하루가 걸렸다.

[사진 1] [사진 2] [사진 3] [사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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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제일교회 장광영 목사편 -역경의 열매(2) >

1996년 12월 12일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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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동산중학교에 입학했다. 작은방 하나를 얻어서 자취를 시작했는데 생활이 궁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형님이 보내주시는 작은 돈으로는 학비하기도 벅차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그런데 형님이 갑자기 급성맹장염에 걸려 인천 도립병원에 입원했다. 이젠 학비가 나오는 길도 막힌 것이다. 중도에 학교를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버틸 수 있는 상황까지 버티어 보기로 했다.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방에 불을 피우고 자본 적이 없다. 땔감을 살 수 없었던 것이다. 밤새 추위에 떨다가 새벽이 되기가 무섭게 학교로 달려갔다. 그것은 교실에 난로를 피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밤새 언 몸을 녹였고 그 다음은 교장 선생님이 사시는 사택으로 달려가 마당을 열심히 쓸었다.

그러면 사모님이 나오셔서 수고했다며 뜨거운 물에 분유를 타서 주시곤 했다. 나는 사실 이 우유 한잔 때문에 마당을 열심히 쓸었고 추위 때문에 제일 먼저 달려와 난로를 피웠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타의 모범을 보였다며 모범상을 주었다.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으므로 담임선생님의 도움으로 학비감면을 받은 채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당시는 학제가 6년제라 고등학교 1학년을 4학년이라고 불렀다.

인천에 와서도 교회는 열심히 출석했다. 교회에서는 배고픔도,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처량함도, 돈 때문에 받아야 하는 서러움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1950년 6·25사변이 일어났다. 당시 16살이던 나는 학업이 중단되고 모두들 피란 가는 분위기에 휩쓸려 고향인 자월도로 돌아갔다. 섬은 전쟁의 포효나 비극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조용했다. 이곳에서 3개월쯤 지내니 답답해 견딜 수 없었다. 전쟁도 소강상태라는 이야기를 듣고 분위기도 살필 겸 인천으로 나갔다.

이 때부터 내 인생은 새로운 각도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것도 지금은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 포함되지만 당시의 나는 죽음을 넘나드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겁없이 인천거리를 걷는데 국군이 나를 불러 세웠다.

"자네 어디가나"

"친구 만나러 갑니다"

"몇 살이지"

"16살입니다"

"이 좋은 나이에 조국이 어려움을 겪는데 빈둥거려서야 되겠나. 이 차에 당장 타게. 지금 우리 나라는 자네 같은 젊은이가 필요하네"

나는 강제로 차에 태워져 곧바로 학도의용군으로 편입됐다. 집에 연락할 수도 없었다. 군번도 없는 학도의용군은 글자 그대로 총알받이로 사용되던 전시였다.

그런데 나를 아래위로 내려다보던 장교는 눈이 부리부리한 게 쓸만하다며 전선으로 보내지 않고 미군부대로 배속시켰다.

당시에는 속칭 켈로부대로 불리는 일종의 게릴라부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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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제일교회 장광영 목사편 -역경의 열매(3) >

1996년 12월 13일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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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켈로부대는 미군 소속이었지만 국군으로 이뤄졌다. 비정규군으로 적전방에 낙하산으로 투입돼 교란을 임무로 하는 멍키부대와 육박전을 주로 하는 덩키부대로 나눠졌다. 나는 멍키부대에 배속돼 덕적도에서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내성격은 원래 내성적이었다. 그런데 이 훈련과정에서 완전히 적극적이고 급한 성격으로 변하고 말았다. 켈로부대의 훈련강도는 보통 일반군인의 세배 이상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배운 것은 인간이 정신을 집중시키면 못해낼 일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얼마나 혹독하게 매를 맞고 굶어가며 훈련을 받았는지 우리 훈련병들은 언제나 눈빛이 번쩍거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때의 혹독한 훈련이 후일 나의 목회에 커다란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고 도움이 됐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과정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포함된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적을 단 일격에 죽이는 법, 적지에서 생존하는 법, 비행기 점프훈련 등을 수개월 받은 나는 제일 먼저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당시 16살이던 소년 티가 가시지 않은 나는 피비린내 풍기는 전쟁의 현장 속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만큼 야만적인 행동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였다. 이것은 인간이 지은 죄악의 결과이며 사탄이 끊임없이 충동질하기 때문이다.

나는 결코 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들을 이곳에서 체험했다. 우리 부대는 옹진전투, 사리원전투 등 곳곳에 투입됐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택해 인민군복장을 한 뒤 적지에 낙하,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곤 했다.

나는 점프를 할 때 항상 먼저 뛰어 내리곤 했다. 다른 전우들 보다 더 용감하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일종의 영웅심이 작용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조가 적지에 투입돼 나만 빼고 모두 사살 당하는 비극적인 일을 겪었다. 어느 날 임무를 받고 비행기에 올랐다.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장비를 점검했다. 그 날은 내가 뒤쪽에 앉아 있는 바람에 거의 마지막에 뛰어내렸다. 그런데 내가 점프를 함과 동시에 조명탄이 터지며 주위가 대낮같이 환해졌다. 우리의 계획이 적에게 노출된 것이다. 동시에 기관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적들이 우리를 향해 사격을 시작한 것이다.

앞서 내려가던 동료의 고개가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이 보였다. 총을 맞은 것이 분명했다. 내 옆으로도 총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솟구치며 하나님을 찾았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그대로 내려가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 수류탄을 연이어 밑으로 던졌고 기관총도 쏘아댔다. 갑작스런 반격에 적들도 놀랐는지 총소리가 주춤해 졌다. 그러나 나는 적에게 포위된 상태이니 낙하해도 적에게 잡히거나 사살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전능의 하나님은 피할 곳을 예비해 주셨다. 그것은 내가 기적이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오묘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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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제일교회 장광영 목사편 -역경의 열매(4) >

1996년 12월 14일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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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낙하한 지점은 산중턱의 숲속이었다. 그러나 적들이 수색을 하면 당장 발견될 것이 뻔했다.

"하나님, 저는 이제 죽습니다. 여기서 제 인생은 끝나는 것입니다. 살려주십시오."

절대절명의 기도였다. 그런데 몸이 땅에 닿는 순간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구멍 같은 곳이 눈에 띄었다. 재빠르게 몸을 그 속으로 밀어 넣고 낙하산을 잡아 다녔다. 아주 작은 굴이었는데 입구와는 달리 안은 꽤 넓었다.

이곳에서 숨을 죽이고 거동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주변을 수색하는 인기척이 들렸는데 나로서는 기도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인기척이 사라지자 긴 한숨이 나왔다. 나는 이곳에서 정확히 7일을 숨어 지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신기한 방법으로 나의 생명을 지켜 주셨다. 지금도 이 때를 생각하면 식은땀이 흐른다.

동굴을 빠져나왔지만 복장이 인민군복이니 이번엔 국군을 조심해야 했다. 다행히 암호를 기억했기에 부대에 복귀했다. 부대장은 나도 죽은 줄 알았다며 깜짝 놀랐다. 나를 제외한 침투조 전원이 목숨을 잃은 것을 그 때에야 알았다. 나의 이런 켈로부대 생활은 1년 6개월만에 종료됐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어느 날 중대장과 잠시 대화하는 자리에서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부모님께 연락도 못하고 학도의용군으로 차출됐으며 더 공부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중대장은 내가 그렇게 어린 나이인 줄 몰랐다며 원하면 집으로 가라고 선뜻 전령증을 끊어주는 것이었다. 나는 군번도 없으니 없어져도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하나님, 이 지긋지긋한 전쟁터를 벗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니 죽은 자식이 돌아온 듯 난리가 났다. 나와 함께 차출됐던 친구들의 가족들은 그 생사를 묻고 또 물었다. 그러나 나는 사실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희망을 꺾어버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휴전전이라 어수선한 상황이었지만 인천고등학교에 복귀했다. 전쟁터에서 숱한 죽음을 목격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나로서는 신앙에 더 열심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기독학생회에 가입해 활동하는 한편 창영교회에 출석하며 교회학교교사로 봉사했다. 당시는 교사가 부족해 고등학생들이 초등학교학생들을 지도했다.

5명의 학생을 배정 받았지만 막상 가르치려니 교사로서 내가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다. 기도도 연습하고 공과를 재미있게 연구해 열심히 학생들을 지도했더니 30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내게서 가난은 떠나지 않았다. 이렇게 힘들게 살아서 무엇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염세철학자인 쇼펜하워의 글을 읽고는 자살을 떠올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때 나를 지배하며 용기를 주었던 것은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성경구절이었다.

나는 가난을 극복하고 보란 듯이 잘 살기 위해서는 법대에 진학, 사법고시를 패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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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제일교회 장광영 목사편 -역경의 열매(5) >

1996년 12월 16일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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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법대에 가려는 것은 "가난의 한"을 풀고 권력도 가져보겠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천고교에서 성적이 상위권이었으므로 명문대에 가겠다는 목표를 세워 공부에 매진했다.

사실 나눈 군에서 제대해 복학한 뒤 낙제를 한 경험이 있다. 이때 담임선생님이 나무라지 않고 더 열심히 하라며 격려를 했는데 이 때 큰 자신감과 용기를 얻어 공부에 취미를 붙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흉보는데는 앞장서지만 칭찬과 격려에는 인색하다. 말 한마디가 상대방에 주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 체험했기에 항상 조심하고 좋은 언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졸업을 서너 달 남겨놓고 진학대학을 결정해야 할 시절, 큰 형님에게서 편지가 왔다.

"광영아 보아라. 어려움 속에서 공부하느라 수고가 많다. 나는 네가 신학교에 들어가 하나님의 종이 될 것을 16년 동안 한결같이 기도해 왔다.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는 몰라도 나는 네가 신학을 하리라 굳게 믿는다.…"

깜짝 놀라고 당황했다. 내가 목사가 된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0살 때 아버님을 여의고 줄곧 형님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해 온 나로서는 반대의사를 표시하기가 곤란했다. 그리고 우리 집안은 무조건 어른의 뜻에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형님이 나를 위해 16년간 기도했다면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예비된 길을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 아닌가? 일단 기도를 해보자."

진로를 놓고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를 종으로 불러주셨다는 확신이 들었다. 당시 창영교회 중고등부는 3백여 명이 출석했으며 학생들의 기도열기가 대단했다. 그리고 고등부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대부분의 임원들이 신학교에 진학하려 하고 있었다. 그 영향도 받았기에 결국 신학교 행을 결심했다.

당시 감리교신학대학은 경쟁률이 높았는데 입학시험에서 쉽게 합격했다. 당시에도 서대문 냉천동에 학교가 있었는데 기숙사생활을 했던 나는 또 마음고생이 시작되었다. 학비와 기숙사비 때문에 언제나 전전긍긍해야 했던 것이다.

비교적 열정적인 신앙을 갖고 있던 나로서는 오히려 신학교에서 전혀 생경한 사실들을 배움으로 신앙에 대한 회의와 의아심만 부추기게 되었다.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구성됐으며 하나님의 권위까지도 부정하는 충격적인 강의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알아온 사실과 전혀 다르지 않는가? 이런 학문이라면 배울 가치도 없는 것이 아닌가?"

뜻이 맞는 신학생들과 금요철야예배에 참석, 뜨겁게 통성기도한 적이 있는데 이것도 학교에 알려져 호된 질책을 받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신약을 가르친 쿠퍼선교사의 강의는 내게 깊은 영향과 신앙도전을 주었다. 박식한 신학지식을 바탕으로 기독교역사와 성경의 핵심을 찌르는 명강의는 내가 신학교에 미련을 갖게 한 마지막 보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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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제일교회 장광영 목사편 -역경의 열매(6) >

1996년 12월 17일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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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2학년 1학기를 종강할 때였다. 간밤에 양떼를 거느리고 가는 꿈을 꾸었는데 이환신 교수가 나를 부르더니 인천서 지방 김용련 감리사를 찾아가 보라고 했다. 당시 권사님 몇 분이 인천 도림동, 일명 오봉산이라고 부르는 곳에 교회를 개척하는데 그곳에서 목회를 해보라는 권유였다.

사실 자신이 서지 않았다. 확실한 대답을 못하고 오봉산 교회를 방문했다. 아침 8시에 출발했는데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경이었다. 막상 가보니 교회건물이 아직 없으며 방앗간을 임시예배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권사님이 나를 맞아 "전도사님!" 하고 부르는데 얼굴이 붉어졌다. 처음 듣는 이 호칭이 어색하고 쑥스러웠던 것이다.

"그래, 목회자의 길을 서원했으니 이런 곳에서 철저히 훈련한다는 자세로 최선을 다해보자."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것과 함께 성도 10여명과 개척한 이 교회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새벽기도였다. 5시에 예배를 드리려면 4시에 일어나 준비를 해야 했는데 습관이 안된 터라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외국에는 없는 이 새벽기도가 한국에만 왜 있는지 불평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기독교 서적을 집중적으로 읽으며 기독교역사의 모든 위대한 지도자들이 새벽에 기도하며 선지자의 사명을 다해왔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새벽기도를 통해 성도보다 내가 더 변화되고 은혜를 받았다. 지금 돌이키면 이 새벽기도야말로 나의 신앙을 매일매일 새롭게 되살아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새벽 미명, 하나님과의 뜨거운 교제를 통해 하루가 활력이 넘쳤다. 심방도 빠짐없이 다니고 유년부와 중고등부를 활성화시켰는데 9개월만에 성도가 170명으로 늘어났다. 무교회지역인 탓도 있었지만 여간 뿌듯하지 않았다. 개학한 뒤에는 토요일에 내려와 심방을 하고 예배를 인도한 뒤 월요일 아침에 올라가곤 했다.

3학년 새학기가 시작됐을 때였다. 기숙사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복도에서 "신학생 여러분, 강원도 산골에 와서 일할 사람이 없소."라는 소리가 들렸다. 춘천지방 감리사 명관조 목사님이었다.

교회를 맡아 그런 대로 급성장 시킨 경험이 있던 나는 또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강원도 홍천군 남면 시동리에 있는 시동교회로 목회지를 옮겼다. 토요일이면 4시간 거리인 양덕원까지 가서 1시간 20분을 걸으면 시동교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목회 했는데 시골성도들이 내게 조용히 다가와 살며시 쥐어주던 찐 계란의 온기를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시동교회 시무도 6개월을 넘길 수 없었다.

내게 군복무 영장이 나온 것이다.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한 경력이 있는 경우는 복무가 면제되거나 그 기간만큼 의무복무를 빼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내가 증빙서류를 갖고 갔더니 사례비를 요구했다. 내가 돈이 있을 리 없었고 부득이 교회를 사임하고 논산 훈련소에 입대할 수밖에 없었다.

막상 논산훈련소를 입소하니 걸핏하면 훈련병들을 괴롭히고 벌을 주는 것이 일과였다.

[사진 5] [사진 6] [사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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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제일교회 장광영 목사편 -역경의 열매(7) >

1996년 12월 18일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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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군 생활을 하는 것도 은근히 화가 나는데 내무반장에게 괴롭힘까지 당하자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밤에 내무반장인 하사를 조용히 불러냈다. 훈련병이 건방지게 자기를 부른다며 눈을 부라리던 그를 내가 대뜸 멱살을 감아쥐었다.

"야!, 나는 켈로부대에서 군 생활을 했어. 당신 그렇게 못되게 굴면 크게 당하는 수가 있어" 당시 켈로부대의 전력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내무반장의 태도가 다음날부터 180도 달라졌다. 훈련도 면제받았다. 8주간을 훈련소에서 편히 보내고 연천군에 있는 ○○부대에 배치 받았다. 대학을 다니다 왔다고 작전과 교육계 일을 맡겨 주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군에 다시 보내신 것은 나름대로의 뜻이 있어서 일 것이다. 그 뜻에 순종하며 성실하게 생활하자."

주일날 교회에 가려고 하니 민간인교회에 외출증을 끊어서 가야 한다고 했다. 교회에 다녀오긴 했는데 길도 험하고 출입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순간 군인교회를 설립하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일개 사병이지만 담대한 마음을 갖고 대대장을 찾았다. 교회설립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왜 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기독교신앙으로 무장되면 군의 정신력향상에 도움이 되고 정서함양에도 꼭 필요합니다."

"좋아, 교회를 세우자고. 그 대신 자네가 그 교회를 맡아야 하네."

1957년 12월 28일. 전부대원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예배를 드렸다. 나의 군 생활은 목회여정의 연장일 뿐이었다.

당시 군인들은 저학력자도 많고 폭력전과자도 많아 전도하기가 많아 전도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낸 첫 번째 전도방법은 건빵을 들고 보초병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무료해 있던 보초병에게 고향을 물어보고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기도를 해주었다. 반응이 참 좋았고 전도효과도 높았다.

그리고 당시에는 군에서 총기사고가 많아 부대에서 장례식을 치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누구도 동료들의 염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이 일을 맡고 나섰다. 특히 여름철에 썩어 가는 시체를 다룬다는 것은 큰 인내를 요했다. 이 일로 장병들이 많은 감동을 받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부대밖에 있던 장교의 댁에 심방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중학생이 갓 됐음직한 어린이 여럿이 놀고 있다가 하나가 말을 걸었다.

"아저씨는 군대 오기 전에 무슨 일을 하셨어요."

"신학대학에서 공부하다 왔지."

"아저씨, 그럼 우리들 공부 좀 가르쳐 주시면 안돼요. 저희들 공부가 하고 싶은데…"

그 애들은 생활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집안에서 잡일을 거들며 지내던 어린이들이었다. 나로서는 대답을 해줄 수 없었기에 그냥 부대로 돌아왔지만 그 어린이의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이것을 부대장에게 건의, 또 승낙을 받아낼 수 있었다.

[사진 8] [사진 9] [사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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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제일교회 장광영 목사편 -역경의 열매(8) >

1996년 12월 19일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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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중등구락부라는 이름을 걸고 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학생들을 모았더니 금방 80명이 몰려왔다. 그들은 의욕만 있었지 교과서나 연필 한 자루 마련할 형편이 아니었다. 서울의 아는 분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했고 헌 교과서와 학용품을 마련해 공부를 시작했다.

3년 중학과정을 속성으로 열심히 공부시킨 결과 2년만에 검정고시 합격률을 85%로 높였다. 그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감격스럽게 눈물 흘리며 기뻐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이들은 지금 회사의 중역이나 사업체의 사장이 되어 부흥회장소에서 가끔씩 뜻깊은 해후를 하곤 한다. 이후 성경중등구락부는 시온중학교로 정식 인가되어 학생들을 계속 배출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군부대교회도 안정되고 제대를 6개월 정도 남겨 놓았을 때였다. 당시 부대와 그리 멀지 않은 연천 군남면 수복지구에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고 있었다. 병장이라 비교적 부대출입이 자유스러웠던 나는 제대 후 이곳에서 다시 개척교회를 할 계획으로 일단 천막교회를 열었다.

그리고 주일날 군부대교회에서 9시 예배를 인도한 뒤 다시 이곳 천막교회에서 11시 30분 예배를 인도했다. 교인 12명으로 시작했던 군남교회는 생각만큼 성장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맨몸으로 이주한 주민들이 얼마나 가난한 지 끼니조차 거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복음에 앞서 떡이 더 시급하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기독교 세계봉사회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도움이 왜 필요한지를 공문으로 자세히 작성하고 이장, 면장, 군수의 도장까지 받았다. 도움을 준다는데 도장을 찍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 결과 6트럭의 밀가루와 의류를 지원 받아 주민들에게 고루 나누어 줄 수 있었다. 그러자 금방 내 인기가 올라갔다. 제대를 하고 교회 일에 더 열심히 매달렸다. 나는 이곳의 가난이 먼저 퇴치되지 않으면 복음화도 계속 더디어진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구판장과 양곡조합을 만들었다. 양곡조합은 헐컴선교사의 지원을 받아 쌀 50가마를 마련, 이를 빌려준 뒤 추수 때에 이자를 붙여 쌀로 갚도록 한 것이었다. 이것은 어렵게 보릿고개를 넘기던 주민들에게 높은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이곳 주민들이 터무니없이 높은 값으로 생필품을 사 쓰고 있었다. 운송하기가 힘들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이것이 불합리해 구판장을 연 것이다. 처음에는 인기가 없었으나 점점 물건이 늘어나면서 주민들이 모두 이곳을 이용했고 이 때문에 나는 다른 상점으로부터 고발을 당하기도 했다.

교회 성장의 일환으로 인근 3백 가정을 하루 10집씩 심방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새벽기도를 마치면 곧장 성경가방을 들고나섰다. 무조건 집을 찾아오는 젊은 전도사를 박대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 때만 해도 인심이 넉넉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정신없이 뛰어다닌 보람과 하나님의 은혜로 드디어 교회대지를 마련, 25평의 건물을 짓고 입당예배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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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제일교회 장광영 목사편 -역경의 열매(9) >

1996년 12월 20일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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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규모지만 교회를 세우고 나니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 없었다. 성전이 마련됐으니 더 열심히 전도에 매진했다. 그러나 성전을 마련한지 2년이 지나도록 친정에 있는 아내를 데려올 수 없었다. 같이 지낼 방이 없었던 것이다. 나야 성전에서 자면 됐지만 아내와 아이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입대전 형님의 중매로 국민학교 동창인 아내(강영안사모)와 결혼했는데 가장으로서는 낙제점수였다. 어느 날 아내가 아들을 등에 업고 간단한 살림살이를 마련해 나를 찾아왔다. 무작정 기다리기가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이곳까지 찾아오도록 만든 것이 미안했다. 교회청년들이 나서서 월세 방을 하나 구해 주어 겨우 거처를 마련했다.

교회개척과 함께 복학했던 감신대를 졸업했다. 그 동안 열심히 노력한 보람과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는 많이 성장했다. 그러나 성도들의 어려운 환경은 크게 나아지지 않아 교회살림은 더 힘들었다. 성도가 많아지면 헌금이 늘어나야 하는데 지출만 더 많을 뿐이었다. 양곡사업과 구판장을 통해 성과를 얻었던 나는 양계사업과 축산업, 양봉 등을 도입해 가난을 타개하도록 최선을 다했다. 지금도 이 분야에 나름대로 일가견을 가질 만큼 공부도 했다. 다소 실패도 있었으나 이런 노력들이 인정을 받아 개척 5연 후엔 전성도가 내가 하는 일은 무조건 찬성해 주었다.

농촌에서 선교하겠다고 다짐하던 내게 변화가 생겼다. 당시 60년대 초반은 산업화·도시화가 막 이루어지던 시절이라 농촌인구들이 대거 도시로 빠져나갔다. 정부도 공업화 정책을 지향해 내가 바라던 농촌목회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마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사회국에서 농촌운동강사를 모집하는데 와서 일해 달라는 초빙도 받은 터라 목회지를 서울로 옮길 것을 결정했다.

더구나 서울 금호동에서 개척된 지 9개월된 금호제일교회가 있는데 새 목회자를 찾는다고 해서 찾아가 부임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막상 교회에 가보니 그나마 분란이 있어 120여명 되던 성도들이 흩어지고 40명의 성도만 남아 있었다.

1966년 당시 금호동은 외곽 빈민지역이었다. 수돗물도 공급되지 않고 도로포장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모든 조건을 보면 군남교회보다 훨씬 목회여건이 나빴다.

"나는 젊지 않은가? 지금까지 어려운 상황을 이겨왔는데 이것도 극복하고 목회에 성공을 하자"

이 때 우리 부부는 하루에 죽 한 그릇으로 끼니를 이을 만큼 가난했다. 헌금은커녕 우리가 보아도 성도들이 모두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였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어려움을 내색할 수도 없었다.

아내는 빈혈로 일어서지 못했다. 시력과 청각이 희미해진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영양실조였다. 잘못하면 실명할지도 모른다고 했을 때 나는 기도로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게 더 큰 역경이 다가왔다. 후두암이라는 엄청난 선고를 받은 것이다.

[사진 11] [사진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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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제일교회 장광영 목사편 -역경의 열매(10) >

1996년 12월 21일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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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새벽기도설교를 하는데 목이 꽉 잠겨 말이 나오지 않았다. 좀 지나면 괜찮아지리라 생각했는데 영 차도가 없었다. 약국에서 약을 지어먹어도 효과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병원을 찾았다. 오랫동안 나를 진찰한 의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후두암입니다. 건강이 안 좋은 터에 목을 너무 무리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더구나 아내는 영양실조로 누워 있는데 남편으로서 제대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왜 이렇게까지 만드시는 것일까? 그 동안 나는 하나님을 위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오지 않았는가? 이 절망과 고난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내재되어 있는 것일까?"

깊은 회의와 갈등이 밀려왔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이것은 나의 목회를 한 차원 더 높여 주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시작이었다.

암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시절이었던 만큼 자식과 아내를 둔 나로서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한강 백사장에 홀로 나가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키며 눈물을 흘렸다.

"여기서 좌절할 수는 없지 않는가? 나의 이 역경이 주님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면 얼마나 단순한 행동인가? 마음을 고치고 담대함으로 현실을 받아들이자. 성도들에게 내색을 하지 말고 현실에 최선을 다하자."

목의 통증 때문에 설교를 할 수 없었던 나는 68년 12월 30일부터 1월 4일까지 6일 동안 동두천제일교회를 담임하시던 권중길 목사님을 초청해 부흥회를 열기로 했다. 당시는 부흥회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간 열렸다. 후두암이 더욱 악화되어 심적으로 크게 부담스러웠지만 나도 이번 기회에 새로운 신앙의 계기를 맞이할 것을 다짐했다.

1월 2일 저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권 목사님이 "기도의 능력을 받자"는 제목으로 설교하셨다.

"여러분! 기독교인은 기도의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목회도 기도의 영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영적 세계는 기도로 열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나의 폐부를 찌르는 듯 숨이 막혔다. 그 동안 새벽기도에서 교회예배에서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한다고 했지만 가슴을 찢고 통회하는 간절한 기도를 얼만큼 드렸는가 스스로 질문했을 때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래 오늘 한번 하나님께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기도의 문을 열어보자."

예배가 끝난 뒤 차가운 마루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작정을 했지만 내 앞에 놓인 답답한 문제들이 워낙 많았으니 저절로 몸부림치는 기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기도는 점점 시간이 갈수록 가속도가 붙었다. 환란날에 내게 부르짖으라고 명령하신 말씀은 바로 나를 향한 주님의 음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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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제일교회 장광영 목사편 -역경의 열매(11) >

1996년 12월 23일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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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날 기도를 통해 내가 목사면서도 지극히 평범한, 의식적인 기도생활을 해왔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엔 밤새도록 기도를 했건만 기도가 힘들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는 것조차 모를 정도였다.

기도는 깊은 곳까지 가라앉아 있던 나의 영혼을 새롭게 소생시켰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이뤄지는 것 같았고 기쁨과 감사가 용솟음쳤다.

"이렇게 목회에 용기와 자신감을 주는 기도의 세계를 진작 몰랐을까"

나는 후두암환자란 사실도 잊은 채 기도와 성경연구로 일과를 보냈다. 이런 어느 날이었다.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나의 질병을 고쳐주신다는 강한 믿음이 다가오며 뜨겁고 간절한 기도가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울컥하며 목에서 피가 쏟아졌다. 한참을 쏟아내니 목이 시원해지며 주님이 내게 신유의 역사를 베풀어 주셨다는 믿음이 생겼다.

이후 후두암은 거짓말처럼 치료되었다. 그 후유증으로 목소리가 지금처럼 굵고 탁해졌지만 의사는 내게 기적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자 나의 기도생활은 가속도가 붙었다.

그래서 아예 삼각산 통일봉에 기도처를 정하고 밤마다 산기도를 하러 다녔다. 이 무렵 성도들이 내게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목사님 설교가 예전 같지 않아요. 메시지에 은혜가 충만하고 능력이 넘치는 것 같아요."

꼼짝하지 않던 성도수도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5평 블록건물을 65평으로 증축하고 이것도 협소해 예배를 4부까지 드리기 시작했다.

목회란 인위적으로 계산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오직 무릎으로 기도할 때 성장하게 되는 것임을 철저히 깨달았다.

이런 내가 부흥사로 나서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한번은 삼각산 통일봉에 올라가 기도를 시작했는데 기도가 멈추어지지 않았다. 겨울이라 담요 한 장을 덮고 기도하는데 얼마나 기도에 몰입됐는지 산을 내려가기가 싫었다. 그래서 마침 잠깐 지난 것 같이 3일을 산 속에서 보냈다.

3일간의 기도를 마치고 자하문 쪽으로 걸어서 산을 내려오는데 그렇게 기분이 상쾌할 수가 없었다. 주위의 풀과 나무와 산새와 공기마저도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른 아침에 17, 18세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곱추를 만나게 되었다. 다른 때 같으면 무심히 지나쳤을 텐데 그날은 장애를 가진 그 처녀가 그렇게 불쌍하고 안되어 보일 수 없었다. 그녀를 위해 기도해 주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쳤다.

"아가씨, 내가 기도해 주고 싶은데 괜찮겠소."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목사님이냐고 되묻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나는 처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눈물의 기도를 쏟아놓기 시작했다. 아마 이 모습을 누가 봤으면 미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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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제일교회 장광영 목사편 -역경의 열매(12) >

1996년 12월 24일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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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기도를 마치고 길에서 만난 꼽추처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한 뒤였다.

"목사님, 등이 펴진 것 같아요. 등이 예전 같지 않아요."

그 처녀는 상기된 얼굴로 펄쩍펄쩍 뛰며 어쩔 줄 몰라했다. 오랜 기도 후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더 강하게 역사 된다는 사실도 이날 알게 되었다.

다시 교회에서 폐병말기에 있던 중학생이 기도를 받은 뒤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되었고 이어 유방암에 걸렸던 여자까지 낫게 되자 소문이 쫙 퍼져 나가며 성도들이 더욱 늘었다. 이 때 환자를 위해 기도할 때는 언제나 방언기도가 나왔다.

교회가 부흥되는 가운데 신유은사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생전 처음 부흥회 초빙을 받은 나는 가슴이 떨렸다. 첫교회가 강원도 영월의 녹전감리교회였는데 막상 가보니 부흥회를 한번도 끝까지 해본적이 없다고 했다. 그것은 그곳의 한 여성도가 정신이상이 너무 심해 수시로 칼을 들고 난리를 피우는 통에 강사들이 그냥 돌아가 버리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인도한 부흥회 기간동안은 그 여성도가 조용히 집회에 참석하고 한번도 발작을 하지 않았다. 반응도 좋았는지 인근의 교회들이 나를 초빙해 주일예배만 인도하러 서울에 다녀갈 뿐 계속 강원도에 머무르게 되었다. 강원도를 순회한 뒤 이번에는 수원 쪽에 초빙을 받았는데 이곳에서도 계속 부흥회가 연속으로 이어져 수원근방에서만 37개 교회의 부흥회를 인도했다.

젊은 목사가 부흥사로 갑자기 나타나 활발하게 사역하자 안 좋은 소문도 꼬리를 물었다. 무당식으로 부흥회를 인도하며 지나치게 성령의 역사와 신유를 강조하고 방언을 일삼는다는 것 등이었다.

내가 마술을 해 성도를 속인다는 소문도 있었다. 당시는 성령운동과 방언에 대해 교회가 경계하며 이단시하려는 경향이 강했던 때였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속한 감리교단에서 소문진상파악을 위해 <장광영목사조사위원회>가 구성됐다. 조사위원들이 나를 찾았고 그 분들의 질문에 조금도 거리낌없이 대답했다.

"저는 산기도를 통해 능력을 받았고 그 은혜가 주님의 전도사명인 것으로 확신해 부흥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내가 행하고 있는 것 중 어느 것이 비성경적인 것이 있습니까? 2천년 전 예수님의 사역을 믿는다면 지금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도 믿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장 목사는 앞으로 집회에서 방언을 계속 할 것입니까?"

"방언은 제가 한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안한다고 해서 안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이 시키시면 하고 안시키시면 안할 따름입니다."

조사위원회의 결과는 "무혐의"였다. 오히려 나중에 조사위원의 교회에 부흥회 청빙을 받았다.

[사진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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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제일교회 장광영 목사편 -역경의 열매(13) >

1996년 12월 25일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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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사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도 교회성장은 계속돼 74년 교회 건축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성도 한 사람이 땅 한 평 사기 운동을 벌여 4백 85평을 매입했다. 당시에도 성도들 대부분이 가난했다. 건축헌금이라고 크게 내놓을 만한 성도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성전을 설립해야 한다는 간절한 열정과 사명을 모두 갖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무리하지 않았다. 차근차근 준비를 해 1978년에야 기공식을 가졌고 81년 10월에 1천 7백석의 성전을 완공했다.

지금도 보람을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타교단보다 잘돼 있는 감리교 목회자 은급사업의 기초를 닦는데 기여했다는 점이다. 74년으로 기억한다. 강릉의 한 교회에 부흥회를 갔다가 성회를 마친 뒤 성도들이 관광을 시켜준다며 나를 산으로 안내했다. 그곳에 있는 한 사찰을 방문했다가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곳의 종을 치는 노인이 바로 은퇴한 나이 드신 목사님이었기 때문이다.

목사님이 어떻게 이곳에 계시냐고 항의하듯 되물었더니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갈 곳도 생계도 막막한 터에 이곳에서 종만 치면 먹여주고 재워주니 있게 되었다고 겸연쩍은 듯 말씀하셨다. 나는 교회에서 받은 사례비를 모두 드린 뒤 또 연락을 드려 방을 얻어드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지켰다. 그리고 부흥회에 가는 곳마다 이 사실을 강조하며 원로목사를 대우하고 후원하도록 강조했다. 장위동교회 장병호목사님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다가 이 이야기를 또 꺼냈는데 그분이 본격적으로 은급사업을 시작해 체계가 잡히게 되었던 것이다.

믿음의 선배들을 잘 기억하고 대접하고 기리는 것은 후배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나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목회좌우명 중의 하나가 "선배의 고마움을 알고 존경하며 후배를 아끼고 사랑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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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제일교회 장광영 목사편 -역경의 열매(14) >

1996년 12월 26일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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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와 함께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로 온 아펜젤러(1858~1902년)는 근대교육의 효시인 배재학당설립 등 교육사업에 주력하는 한편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교회를 설립했고 신학교육준비와 선교부 설치에 앞장선 인물이다. 성경번역에도 깊이 관여했던 그는 27세에 한국에 와 43세에 소천하기까지 수많은 사역을 펼쳤다.

나는 이분을 기념하는 사업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해 아펜젤러 기념장학회를 만들었다. 모금운동을 해서 국내 신학생들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아펜젤러가 신학을 공부한 미국 드류대학의 학생들을 돕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교육사업을 통해 선교에 헌신하신 만큼 그 은혜에 감사해 모교에 장학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 드류대학에 몇 차례에 걸쳐 10만 달러 정도의 장학금을 보냈다. 이것이 모태가 되어 우리가 미국에 아펜젤러 기념교회를 하나 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펜젤러를 배출한 미국 뉴저지연회와 연락해 교회건축지원을 합의하고 93년 내가 추진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모금운동을 펼쳤다.

"여러분, 우리가 미국에 아펜젤러 기념예배당을 건립하는 일은 복음의 빚을 갚고 한·미간의 교류를 폭넓게 하는 동시에 미국의 선교운동을 되살리는 뜻깊은 일입니다. 적극 참여해 아펜젤러의 사역을 기립시다."

뉴저지 올더스게잇 수양관에 지어질 이 교회 예산은 50만 달러였다. 67개 감리교회가 참여했고 드디어 지난 96년 7월초 미국에서 1차 건축비 12만 달러를 전달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이날 뉴저지연회 아이언감독은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한국교회가 이제 크게 성장해 미국에 기념교회까지 설립해 매우 자랑스럽고 기쁩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를 기념하는 이 교회는 한·미간의 교회교류와 우호를 확인하는 귀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미 상당액이 모금되어 있는 이 기념교회는 내년 가을에 완공돼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펼칠 예정이다.

교회설립에 관해서 기억나는 일이 많다. 그 중에서도 경남제일교회를 교회창립 30주년을 맞아 건축한 일은 큰 보람을 느낀다. 87년에 내가 펄시 콜레의 <내가 본 천국>이란 책을 번역, 출간해 모두 2억 4천만원이란 큰 수익을 얻었다. 모두 60만 부가 팔린 것이다. 나는 이 돈을 국내신학교와 미국 드류신학교에 각 4천만 원씩 장학금을 보내고 장애인선교와 교회건축기금지원 등으로 1억 2천만 원을 썼다. 남은 돈에 은행대출을 받아 감리교가 약한 창원에 교회 건축용 땅을 매입했다.

그런데 마산동지방회 부흥회를 인도했다가 교회가 철거당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목사님을 우연히 만났고 그 교회를 아무런 조건 없이 지원해주기로 했다. 땅값과 건축비 등 모두 14억원이 소요된 교회를 아무런 연고 없는 목회자에게 기증한 일은 교계 화제가 됐다.

[사진 14] [사진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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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제일교회 장광영 목사편 -역경의 열매(15) >

1996년 12월 27일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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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가 자리를 잡고 부흥사로 활발히 활동하던 1984년 나는 목회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뜨레스 띠아스운동>에 참석하고 나서였다. 미국에 갔다가 우연히 아는 목사의 소개로 이 행사에 참석했는데 그 과정 속에서 '바로 이것이다'라는 강한 확신이 생겼다.

스페인어로 '3일'이란 뜻의 이 운동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짧은 모범생활'이란 의미를 갖는다. 2차대전 후인 49년 스페인 마조르카에서 시작됐는데 미움과 다툼, 고통으로 일그러진 사람들의 마음에 참신한 그리스도의 정신을 심는 프로그램이다. 57년에 미국으로 소개돼 전역으로 확산돼 활발히 운영되고 있던 중 내가 참석한 것이다.

3일간 모든 것을 잊은 채 그리스도인의 참된 생활을 경험하는 이 프로그램은 형식과 신분, 학식과 나이를 벗고 오직 주님의 사랑 안에서 진정한 구원의 기쁨을 만끽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나는 이 체험과 내용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 자체를 밝히지 않는 것이 이 운동의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사랑을 강조하고 믿음의 활력을 주는 프로그램이며 신앙의 나태를 느끼는 이들에게 새로운 도전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하는 운동이다. 나중에 다른 단체에서 실시한 이 운동이 국내에서 다소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는데 이것은 프로그램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도한 당사자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운동을 한국에 도입하기로 했다. 한국교회야말로 예전의 선교열정과 기쁨을 잊어버리고 있어 이 운동이 절실하다고 판단한 것이 이유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한국실정에 맞게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5년간 이 프로그램을 연구한 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한인교회와 현지관계자들의 도움을 얻어 한국에 <골든 뜨레스 띠아스>를 창립했다. 89년 9월 21일 제1기를 열었다. 그 때의 감격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여기에 참석한 많은 분들이 변화를 받고 입으로 전해주어 지금까지 60기 3촌 5백여 명이 이 프로그램을 수료했다.

몇 년 전에는 아예 우리 교회 기도원이 있는 경기도 상판리에 골든 뜨레스 띠아스 즉 예수사랑운동을 위한 전용건물을 지어 참석자들이 조용한 자연 환경 속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초교파적으로 운영되는 이곳은 이제 많이 알려져 신청자를 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다.

나는 70년대 초부터 기도 때마다 하나님의 성령이 중국을 위해 기도하게 하셨다. 당시만 해도 꽁꽁 얼어붙어 접근조차 안됐던 중국이기에 선교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의아스럽게 생각하며 기도를 계속했는데 하나님은 참으로 오묘하게 역사 하셨다.

우리 교회에 모 권사님이 해방 후 중국에 남겨두고 온 맏아들 때문에 늘 걱정하면서 내게 유언을 남겼다. 목사님께서 꼭 아들을 만나 예수를 잘 믿을 것을 전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중국을 향한 섭리의 시작이었다.

[사진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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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제일교회 장광영 목사편 -역경의 열매(16) >

1996년 12월 28일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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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권사님의 유언을 들어주기 위해 미국에 살고 있는 딸과 함께 기도하던 중 극적으로 권사님의 아들 중국주소를 알게 되었다. 그 아들은 중국에서 고위층 간부였는데 동생을 만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미국을 방문했다. 간부직함으로 미국에 올 수 없었던 것이다. 나도 미국에 가서 권사님의 유언을 전했다.

이 분과 연결고리가 되어 중국과 다각적인 물꼬를 틀 수 있었다. 무역관계일도 많이 주선했지만 나의 관심은 선교에 있었다. 중국은 개방화 정책을 쓰기 시작했지만 종교만큼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래서 기독교분위기를 느낄 수 없는 행사를 가졌고 올해 7월에는 북경국제회의센터에서 <한·중과학기술문화경제교류대회>란 이름으로 큰 행사를 열었다.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를 비롯해 최성규 목사 등 여러 목사님들과 성도 400여명이 참석해 4일 동안 계속한 이 행사는 한·중 교류를 표면으로 내세웠지만 중국에 복음을 간접적으로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믿는다.

이곳에서 강연을 맡은 나는 설교를 준비했는데 중국 측에서 하나님이란 말을 쓰지 말고 찬양을 할 수 없으며 선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의를 받았다. 그러나 단위에 올라가니 나도 모르게 그들을 향한 복음적 메시지가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금방 마이크가 꺼져버렸고 나는 퇴장해야 했다. 사회자가 참석자들에게 지금의 연설자는 기독교용어를 썼기에 연설을 중단시켰다고 해명했다.

그런데 나중에 중국의 장관급 인사가 나를 찾아와 마이크를 끈 것을 사과하며 그 대신 내년에 중국 무한에서 5천명이 모이는 집회가 있는데 그곳에서 오늘 하지 못한 설교를 그대로 해달라고 했다. 설교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놀라며 감사했다.

해외선교사역 중 칠레선교도 이야기하고 싶다. 89년 교회에서 이길소 목사를 남미 칠레에 파송했다. 현장을 가보니 그곳이야말로 복음이 절실했다. 카톨릭 국가라고 하지만 형식적이고 무속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원주민선교로 방향을 잡은 뒤 <미션 안데스>란 선교부를 사단법인으로 등록하고 본부건물을 매입 현지 개신교선교의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나의 해외선교관은 가능성이 확인되면 최대한의 지원으로 분명한 결실을 맺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다른 교회까지 돌아다니며 모금운동을 펼쳐 칠레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이곳 선교부를 통해 21개의 원주민교회가 개척되었고 현지교포를 위한 한국어 선교방송도 하고 있다. 2천5백여 평의 대지에 신학교를 설립해 3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특히 칠레개신교연합회와 공동으로 칠레 개신교 복음화 대회를 열어 성과를 얻고 있다. 남미 13개국 목회자와 성도들을 초청해 대규모로 갖는 이 행사는 칠레에서 개신교의 지위를 높이는 계기가 되고 있다. 올해 내가 주강사로 참석해 성령운동을 강하게 강조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돌아왔다.

[사진 17] [사진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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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제일교회 장광영 목사편 -역경의 열매(17) >

완결

1996년 12월 29일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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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신학교 2학년 때 첫목회를 시작했으니 올해로 성역 40주년을 맞았다. 어렵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하나님의 은혜 속에 보람과 기쁨, 감사가 넘치는 시간이었음을 기억한다.

그 동안 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장을 비롯 여러 행사와 단체의 책임을 맡으면서 교회연합사업에도 많이 참여했고 특히 해외감리교회들과 폭넓은 교류를 펼친 것은 보람으로 남는다.

얼마 전에는 미국의 교계지도자 30여명을 초청해 한국교회를 견학시키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실시, 좋은 반응을 얻었다. 농촌교회까지 한국교회의 곳곳을 보며 한국선교와 성장에 대한 폭넓은 이해의 시간을 가졌다. 이제 한국교회도 세계 속으로 자꾸 뻗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도 세계화가 이뤄지고 선교사업도 첨단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금호제일교회는 중국선교와 남미선교에 주력하는 가운데 방글라데시선교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현지 정치인의 협력을 받아 조금씩 접근해 성과를 얻고 있다. 또 매년 연말에는 러시아 및 동구권동포들에게 한복 보내기 운동을 펼쳐 보내주는데 그들에게 조국의 얼을 심고 선교의 동기부여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효과적이다.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누구나 종교에 거는 기대치가 있는데 국내에서는 개신교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해 그 인지도가 약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더 큰 힘을 갖고 더 많은 봉사를 하면서도 응집력이 약해 이런 비판을 받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평생 기도의 내조자, 주신 아내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허락하셨다. 큰아들은 미국LA에서 사업을 하고 있고 둘째, 딸은 교회에서 지휘자로 봉사하며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있다. 막내아들은 감신대와 미국 드류대학에서 공부한 뒤 뉴저지 모리스타운 연합감리교회 목사로 시무 중이다.

자녀들이 무탈하고 제몫을 다해 주는 신앙인으로 커 하나님께 감사한다. 사실 아내의 노고와 기도가 컸기에 목회도 자녀교육도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인천에서도 배를 타고 한참을 가야했던 오지의 섬 자월도. 철저히 무속종교가 지배하던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우리 집안이 이제 온전히 복음화 된 사실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7남매인데 큰 형님이 처음에 예수를 믿음으로 이 직계가족에서만 목사가 4명, 장로가 3명, 권사가 10명이 나왔으니 감사한 일이다.

올해 나이 62세.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 "조화로운 목회"를 계속 추구하려 한다. 무엇을 하든지 한쪽을 강조하다 보면 반대쪽이 부족해짐을 항상 느끼게 되는 탓이다. 예수님이 어디서나 평안과 기쁨, 감사, 사랑을 가르치신 것처럼 목회에서도 이런 덕목이 언제나 풍기는 목사가 되길 기도한다.

적지 않은 지면을 통해 나의 부족한 신앙여정을 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국민일보와 격려전화를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하며 새해에는 모든 가정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더욱 넘치시기를 기원 드린다.

[사진 19] [사진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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